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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를 공부할 때 어려웠던 점 중 하나가 인물, 사건에 맞는 왕대를 파악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처럼 힘들게 느껴지시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고려 왕조 개괄 표를 만들어 이전 글에 게시해 두었습니다.
참조 바랍니다:
7대 목종
· 경종의 맏아들로 학문을 장려하는 등 치적이 많았으나 강조의 정변으로 피살되었다.
· 개정 전시과 개정: 성종 때 정비된 관등제를 기준으로 관직의 고하에 따라 객관적 토지 분급의 체제로 전시과를 개편하였다.
· 강조의 정변: 목종에게 후사가 없자 모후인 천추태후와 김치양 일당이 유일한 적통인 현종을 죽이려고 하자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가 군사를 동원하여 김치양 일파와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8대 현종
· 강조의 정변으로 왕위에 올랐다.
· 거란의 2, 3차 침입을 받았다.
· 지방제도를 5도 양계 4 도호부 8목으로 정비하였다.
· 성종 때 폐지된 연등회와 팔관회가 부활하였다.
· 불교 통합을 위한 현화사(사찰)를 건립하였다.
· 초조대장경을 조판하였으며, 7대 실록(태, 혜, 정, 광, 경, 성, 목) 편찬을 시작하였고 덕종 때 완성하였다.
· 향리 제도 정비
: 향리 정원제, 향리 공복제, 주현공거법(향리의 과거 응시 자격 보장) 실시
· 주창수렴법 실시: 의창을 보완한 것으로, 각 주에 창고를 설치하여 흉년에 빈민을 대상으로 곡식을 대여해주는 제도이다.
· 면군급고법: 고령의 노부모가 있는 정남의 군역을 면제해주는 제도이다.
· 감목양마법: 군마를 확보할 목적으로 제정한 것으로 말을 기르는 자에게 국가가 지원을 해줌으로써 기병 양성의 기반이 되었다.
· 설총을 홍유후, 최치원을 문창후로 추봉하고 문묘에 배향하면서 문묘종사를 시작했다.
· 구분전 지급(1024): 죽은 군인의 아내에게 구분전을 지급하였다.
※ 거란의 침입(1차: 성종, 993, 거란의 소손녕, 서희의 외교 담판, 강동 6주 확보)
▶ 2차 침입(1010, 현종)
· 1차 침입 후 고려는 송과 외교 단절, 거란과의 친선을 약속하였으나 변하지 않는 외교 태도로 못마땅하던 거란이 강조의 정변(1009)을 구실로 다시 침략하였다.
· 거란 성종의 40만 대군의 침략으로 개경이 함락되면서 현종은 나주로 피난을 갔다.
· 흥화진(의주) 전투에서 양규가 거란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등의 활약하였고, 현종의 친조(입조)를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다.
▶ 3차 침입(1018, 현종)
· 현종이 입조 약속을 불이행하며, 거란의 강동 6주 반환 요구를 거부하자 고려를 다시 침입한다.
·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을 하였다.
· 강감찬이 가죽으로 물을 막아 터트린 흥화진 전투(1018)와 귀주대첩(1019)에서 승리하였다.
※ 거란의 침입 후 영향
· 송, 거란, 고려의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 현종은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개경에 나성을 축조(1009 시작-1029 완성)하여 도성 수비를 강화하도록 하였다.
· 현종 때 강감찬은 천리장성 축조를 건의하였다.
9대 덕종
· 천리장성 축조를 시작(1033)하였다. (압록강 어귀 ~ 동해의 도련포까지)
10대 정종
· 1037년 압록강 일대에 거란이 다시 침략하자 조공을 바치겠다는 화친을 맺으며,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 1039년 책봉을 받았다.
· 천리장성 축조를 완성(1044)하였다.
11대 문종
· 경정전시과를 실시하며 구분전과 공음전을 지급하였다.
· 녹봉 제도를 완비하였다.
· 한양을 남경으로 승격하였다.
· 최충의 9재 학당(문헌공도)을 비롯한 사학 12도가 융성하였다. (관학의 위축)
· 삼복제(1047): 사형수의 판결은 삼심제로 실시하도록 하였다.
· 동서 대비원 정비(1049): 개경의 동, 서 두 곳에 빈민들을 위한 병원을 설치하였다.
· 재면법 실시(1050): 재해시에 세금을 감해주는 제도를 실시하였다.
· 답험손실법(1050): 관리가 직접 조사하여 조세를 수취하는 제도이다.
· 국자감의 수업연한을 9년과 6년으로 정하였다(1063).
· 흥왕사 건립(1067), 둘째 아들 의천을 출가시켰다.
· 기인선상법(1077)을 제정하면서 기인의 인질 성격이 사라지고 잡무를 담당하는 행정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 개경에 경시서를 설치하여 시전을 감독하였다.
· 향리들의 9단계 승진 규정을 마련하였다.
· 송과의 국교가 회복되었으나, 평화 관계를 유지하던 여진족이 문종 즉위 후 여러 부족을 통합하면서 고려를 자주 침략하기 시작했다.
12대 순종
· 재위 1083
13대 선종
· 선종 2년, 동생 의천이 송나라로 불교 공부를 하러 갔다.
· 1086년 의천이 돌아오자 흥왕사의 주지로 삼고 그의 건의를 수용하여 교장도감을 설치하였고, 교장(속장경)을 조판하도록 했다.
· 불교 진흥을 위해 많은 사찰을 건립하였고 국청사(천태종 중심 사찰)를 세웠다.
14대 헌종
· 11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즉위하자 그 해 왕실의 외척인 이자의가 난을 일으켰다.
· 소태의와 함께 이자의를 주살하고 난을 진압한 숙종에게 왕위를 선위 한다.
15대 숙종
· 초기 여진은 말갈이라 불리며 고구려에 복속됨. 발해 멸망 이후 여진이라고 불렸다.
·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겼으며 고려는 회유, 동화책으로 여진을 포섭하였다.
· 완예부를 중심으로 1104년 여진족이 통합되었다.
· 여진족은 고려에 투항해 오던 여진인들을 추격하여 정주성의 장성 부근까지 진출하였고 숙종은 임간과 윤관을 중심으로 토벌을 시도하였지만 기병중심의 여진족에게 패전하였다. → 기병 중심의 여진족에 대응하기 위해 윤관의 건의로 별무반 설치(1104)하였다.
*별무반(기병인 신기군, 보병인 신보군, 승병인 항마군으로 편성)
· 문종의 셋째 아들
· 국청사를 완공(1097)하고 의천을 국청사 주지로 임명하여 해동천태종을 개창하도록 후원하였다.
· 1099년 김위제의 건의로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고 남경에 궁궐을 짓고 개발하였다.
· 평양에 기자 사당을 건립하여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 관학진흥정책으로 국자감에 서적포를 설치하였다.
· 주전도감을 설치하고 해동통보, 해동중보, 삼한통보, 동국통보, 활구(은병) 등 화폐를 주조하였다.
· 윤관은 동북 9성을 축조해야 한다고 건의를 하였다.
16대 예종
· 풍수도참사상의 <해동 비록>을 간행하였다. 1106
· 감무를 파견하였다. 1106
· 윤관의 별무반이 천리장성을 넘어 여진을 축출하고 동북 9성을 축조하였다.(1107)
* 척경입비도: 윤관이 동북 9성을 개척하고 고려지경(비석)을 세우는 장면을 그린 조선후기의 상상도
· 동북 9성을 수비하기 어려워지자 여진의 조공을 약속받고 동북 9성을 환부하였다(1109). → 북진정책의 중단
· 빈민의 구제와 질병의 치료를 담당하는 구제도감(1109)을 설치하였고 빈민의 의약을 담당하는 혜민국을 설치(1112)하였다.
· 여진족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만주 일대를 장악하였고, 아골타는 1115년에 금나라를 건국한다.
· <속편년통재>(홍관, 1116)
· 송으로부터 대성악을 수입하였다.
· 관학진흥책으로 국자감에 7재(중 강예재:무술 교육)를 설치하여 관학을 진흥시켰으며 양현고라는 장학재단을 만들었다.
· 학문연구 및 경연을 하는 청연각·보문각을 설치하였다.
· 복원궁(도교 사원)을 처음 건립하였다.
· 1120년 팔관회에서 개국공신 김락과 신숭겸을 추모하는 도이장가를 지었다.
17대 인종
· 금이 팽창하면서 1125년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 금나라는 고려에 사대(군신관계)를 요구하였고 이에 고려 조정은 치열하게 찬반 대립을 이루었는다.
1) 이자겸의 난(1126.2.)
· 이자겸은 왕의 외척으로 권력을 장악하여 횡포를 일삼았다(관련 키워드: 인수절, 지군국사, 현화사, 아들 출가).
· 이에 왕의 측근 세력인 한안인과 대립하였는데, 이자겸이 한안인을 제거(1122)하면서 십팔자왕위설을 믿고 스스로 왕이 되려 하였다.
· 인종과 그의 측근인 김찬과 안보린은 이자겸을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이자겸과 척준경의 왕위 찬탈을 위한 인종 독살 시도가 있었다.
· 당시 집권자인 이자겸이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금의 사대 요구를 수용(1126.4.)하였다.
· 이로써 고려의 북진 정책은 좌절되었고 조정의 내분은 심화되었다.
· 인종은 이자겸과 척준경을 분열시켜 이자겸을 난을 진압(1126.5.)하였고, 이자겸을 영광으로 유배를 보냈다(굴비 일화).
· 그 후 신진세력 정지상이 척준경을 탄핵시켜 귀양 보냈다.
이자겸의 난으로 왕궁이 소실되어 왕권이 약화되었으며 민중들에게 도참사상이 유행하여 서경천도론이 대두되었다.
인종은 유신지교를 반포하여 혁신 정치를 도모하였으나 귀족사회를 동요시킬 뿐이었다.
이자겸의 난 진압에 공이 있는 김부식(개경 귀족)의 세력이 강화되었다.
정지상 등 척준경을 제거한 공로를 인정받은 서경파는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며 서경파와 개경파로 나뉘어 내부 분열이 심화되었다.
이는 문벌 귀족사회의 붕괴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 1127년 송나라 수도까지 점령하였는데 이에 송나라는 금을 피해 남쪽으로 쫓겨나 남송을 건국하였다.
2) 묘청의 난(1135)
· 이자겸의 난으로 민심은 동요되고 금에 대한 외교 문제로 여론이 분열된 상황이었다.
· 김부식 중심의 개경파와 묘청·정지상·백수한 중심의 서경파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 이는 풍수설에 결부된 전통사상과 유교 정치사상의 충돌로 이어졌다.
· 서경천도론에 호의적이던 인종은 묘청 등 서경파의 요청으로 서경에 대화궁을 짓고 팔성당을 건립(1128)하였으나, 개경파의 반발로 천도에 어려움이 발생하였다.
· 이에 묘청은 국호를 대위국, 연호를 천개로 하고 천견충의군이라는 군대를 조직하여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1136년 묘청의 난은 진압되었다.
· 이로 인해 문벌귀족은 더욱 보수화되어 문치주의를 강화하여 숭문천무 풍조가 심화되어 무신멸시풍조가 만연하게 되었다. 이는 무신정변 발생의 배경이 된다.
문치 강조의 일환으로 인종은 경사 6학을 정비하고, 각 주에 향약을 설치하였으며 강예재(무술교육)를 폐지하였다.
· 묘청의 난으로 서경의 지위가 하락하여 분사제도와 3경 제도가 폐지되었다.
· 김부식은 왕명을 받아 <삼국사기>를 편찬(1145)하였다.
· 신채호는 <조선사연구초>에서 '조선 역사상 제일대사건'으로 평가하였다. 묘청: 낭가와 불교 양가, 국풍파, 독립당, 진취사상)
· <상정고금예문> 편찬(최윤의: 고종 21년 강화 피난기(1234)에 금속활자로 인쇄됨, 28권)
· 송의 사신으로 <선화봉사고려도경>를 저술한 서긍의 입국
서경파 | 개경파 | |
배경 | 지방 출신 개혁 신진 관료 세력 | 보수적 기성 문벌 귀족 |
인물 | 묘청, 정지상 | 김부식, 김인존 |
사상 | 전통사상+불교 및 풍수지리 | 유교 |
주장 | 서경천도 금 정벌, 칭제건원, 자주 국가 강조 |
서경천도 반대 금에 대한 사대, 민생안정 강조 |
성격 | 자주적, 고구려 계승 북진주의 |
보수적, 신라 계승 사대주의 |
18대 의종
· 의종의 향락 정치와 숭문천무 현상이 팽배하여 문신들의 교만이 극심해지면서 무신들의 불만이 커져갔다.
·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정중부의 수염을 태운 사건과 하급 군인들이 군인전을 지급받지 못하던 중에
· 의종의 보현원 행차 때 대장군이소응이 젊은 문신 한뢰에게 뺨을 맞는 사건이 발생(보현원 사건)하였고 이에 분노한 정중부는 이의방, 이고 등과 함께 문신들을 살해하고 의종을 폐하여 거제도로 귀양을 보낸 후 명종을 옹립(정중부의 난, 경인년의 난, 무신정변, 1170)하였다. 이로써 무신집권기가 도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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