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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한국사] 고려 왕조 3

펭키라_HK 2023. 9. 11.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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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신 정변(경인년의 난, 1170)의 영향

· 왕권 약화 및 무신들에 의한 왕의 잦은 교체로 통치 질서의 문란

· 문벌 귀족 사회 붕괴와 능문능리의 신진 관료인 사대부들이 정계로 진출하며 관료 체제로의 전환 촉진

· 전시과 체제의 붕괴로 지배층 무신들의 대토지(농장) 소유 확대, 국가의 세금 수취와 무신들의 수탈 심화로 하극상의 풍조 발생

· 무신들의 권력 쟁탈전으로 국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

· 농민과 천민의 대규모 봉기 발생 및 하층민 출신들이 지배층으로 오르는 경우가 많았음

· 신앙 결사 운동 전개 및 최씨 무신 정권의 후원으로 선종의 발달

· 문벌 귀족의 몰락으로 유학의 쇠퇴

· 소외된 문신의 폐관 문학·은둔적 시조의 발달, 몽골침입 등 국가적 위기로 민족 자주의식이 강조된 사서 편찬

2.  무신집권기

무신집권기개괄

3. 19대 명종 ~ 24대 원종(원종 재임 기간: 1259 ~1274, 무신 정권 몰락: 1270년)

 1) 무신 연합 시기

  (1) 이고·이의방·정중부 (1170~1179)

· 무인들은 무신정변 후 의종을 폐위하고 명종을 옹립하였다.

· 중방 중심: 이전부터 있던 무반의 합의기구인 중방이 무신정변 직후부터 최충헌이 권력을 잡을 때까지 최고 권력 기구가 되었다.

· 외관을 문무교차제로 파견하였으며, 예종 때부터 파견된 감무를 많이 파견하면서 무반 출신들이 정계에 대량으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 무신들은 지방에 파견된 외관들을 통하여 대민 수탈을 자행하여 물적 기반을 확보했다.

· 이에 수탈에 저항하는 반란이 증가하였다.

· 서계민란(1172): 평안도 농민란으로 군인과 농민의 반란이다. 창주와 성주, 철주의 농민들이 정부와 수령의 수탈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고 이후 조위총의 난에도 많이 참여하는 등 순수한 농민반란은 아니었다.

· 동북면병마사 김보당의 난(1173): 무신 정권을 타도하고 의종의 복위를 주장하며 일어난 난으로 이의방의 지시로 이의민이 의종을 살해하였다.

· 교종 승려(귀법사)의 난(1174): 서경(평양)에서 무신 정권에 대항해 군사를 일으킨 사건이다.

· 공주 명학소 망이, 망소이의 난(1176): 명학소가 충순현으로 승격되면서 사회에 불만을 품어 일으킨 난으로 남적, 아주(충남 아산) 지역까지 세력이 확장되었다. 이 반란으로 인해 향, 부곡, 소가 점차 소멸되는 계기가 되었다.

  (2) 경대승(1179~1183)

· 정중부를 제거하고 집권하였다.

· 도방 설치: 도방은 경대승이 장사 100명으로 신변 보호를 위해 창설한 사병 집단이다. 최충헌이 2군 6위의 용력 있는 장졸을 끌어들여 3천 명으로 증원을 확대하였다. 이후 2군 6위는 유명무실화되고 도방이 독재 정치의 권력기구가 되었다.

· 전주 관노들의 난(1182): 군인과 노비가 참여한 반란이었다.

· 1183년 30살에 병으로 요절하였다. 

  (3) 이의민(1183~1196)

· 천민 출신으로 정중부의 부하였다가 경대승이 사망하자 정권을 장악하였다.

· 김사미(운문), 효심(초전)의 난(1193): 신라 부흥 운동의 성격을 띠는 농민 봉기로 이의민이 지원하였다.

· 1196년 최충헌에 의해 제거되었다. 

 2) 무신 확립기(최씨 집권기)

  (4) 최충헌(1196~1219)

· 명종 때 이의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 명종에게 봉사 10조를 건의(1196)하여 다양한 사회개혁을 제시하였다.

· 권력의 위협이 될 무신들을 제거하면서 국가 운영을 위해 문신(이규보, 진화 등)들을 등용하였다.

· 조계종(지눌)을 중심으로 선종이 최 씨 정권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 도방을 자신의 사병화하여 더욱 강화하였다.

· 만적의 난(1198, 개경): 최충헌의 사노비 만적이 일으킨 신분 해방 운동으로 정권 탈취를 목표로 대규모 반란을 계획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경계란 이래 국가의 공경대부는 전부 천예에서 나왔다. 장상이라고 어찌 처음부터 씨가 다를까 보냐. 때가 오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기 상전을 죽이고 노예문적을 불살라 삼한에 천인을 없게 하자. - 「고려사」

· 이비, 패좌의 난(1202, 동경): 신라 부흥을 주장하며 동경(경주 지역의 민란)에서 이비와 패좌가 반란을 일으켰다.

· 징키스칸의 통일 및 몽고 제국 건국(1206)

· 교정도감 설치: 1209년 최충헌은 자신의 암살음모사건을 계기로 반대파를 숙청하기 위해서 교정도감을 설치하였고, 자신이 교정도감의 수장(교정별감)이 되어 독재를 강화했다.

· 최광수의 난(1217, 서경): 서경에서 고구려 부흥을 주장하며 최광수가 반란을 일으켰다.

· 명종과 희종을 폐하고 신종, 희종, 강종, 고종을 세우는 등 국왕을 마음대로 폐립하는 권력을 행사했다.

· 최충헌은 진강후로 책봉되고(희종 때) 진주지방을 식읍으로 받았다. 이후 사저에 흥녕부(진강부)를 설치하여 진주 지방을 관리하였다.

· 전라, 경상 일대에 농장과 노비를 소유하였다.

· 거란족 대요수국의 침입(1218): 제천에서 김취려 장군이 격퇴

· 강동의 역(1219): 몽골에 쫓겨온 거란족의 일부(대수요국)가 고려의 강동성을 점거하자, 몽골+동진국+고려가 합세하여 거란족을 토벌하였다. 이를 계기로 몽고와 형제관계(1219, 여몽협약)를 맺었으며, 몽골은 고려에 조공을 요구하였다.

  (5) 최우(최이, 1219~1249)

· 정방(1225): 최우가 자신의 집에 설치한 정치기구로서 장은 정색승선이라 불렀으며, 모든 관직의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공민왕 때 폐지되었다가 창왕 때 상서사로 개칭되었다.

· 서방(1227): 정방과 마찬가지로 최우 자신의 집에 설치한 문신들의 숙위 기구로서 이규보, 이인로, 최자 등이 활약하였다.

· 마별초 조직: 최우가 만든 사병조직으로 기동력이 강한 기병대이다.

· 삼별초 조직: 원래 최우가 도적떼를 소탕하기 위해 조직한 야별초가 좌별초, 우별초로 확대되고 몽골군의 포로였던 신의군으로 구성된 사병조직이다. 경찰, 전투 등 공적 임무를 맡았으며 훗날 반몽투쟁의 선두가 되었다.

· 몽골 1차 침입(1231): 6년 전(1225)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저고여 피살 사건으로 국교를 단절했던 몽골이 이를 문제삼아 살리타가 지휘하는 몽골군을 보내 고려를 침입하였다. 귀주성에서 박서, 충주에서 지광수와 노군·잡류 별초의 항전이 있었으나 고려는 몽골에게 강화를 요청하여 여·몽 간의 화의가 성립됐고, 몽골은 서북지방에 다루가치를 파견하고 철수하였다. 

· 강화천도(1232): 무리한 몽골의 조공요구로 최우는 다루가치를 제거하고 장기 항전을 위해 고려의 고종과 최우는 강화도로 천도하였다.

· 몽골 2차 침입(1232): 살리타의 몽골군이 다시 침입하였으나 김윤후 장군과 처인 부곡민이 처인성에서 살리타를 사살하고 몽골군을 퇴각시켰다. 처인 부곡은 현으로 승격이 되었으나, 이때 초조대장경이 소실되었다.

· 진양후로 책봉 및 최우의 집은 진양부가 됨

· 상정고금예문을 금속활자로 인쇄(1234)

· 몽골3차 침입(1235~1239): 경주까지 당올태의 침입, 황룡사 9층 목탑이 소실되었으며 강화도에서 팔만(재조) 대장경을 조판하기 시작(1236, 화엄종 승통 수기)하였다. 

· 이언년 형제의 난(1237, 담양): 백제 부흥 운동

· 몽골 4차 침입(1247): 몽골의 아모간이 침입하여 평안도 지역을 약탈하였다. 몽골 황제의 사망으로 철군하였다.

  (6) 최항(1249~1257)

· 몽골 5차 침입(1253): 몽골의 야고와 홍복원이 다시 침입하였고, 방호별감 김윤후가 충주에서 몽골을 격퇴하였다. 충주는 국원경으로 승격되었다. 

· 몽골 6차 침입(1254~): 최항 등의 주전파가 주화파를 처형하자 몽골은 이를 구실로 차라대를 보내 고려를 침입하였다. 충주 다인철소 주민들이 몽골에 맞서 싸웠다(1254). 다인철소는 이후 익안현으로 승격되었다.

  (7) 최의(1257~1258)

· 몽골 6차 침입(~1258)

 3) 무신 해체기

  (8) 김준(1258~1268)

· 무오정변(1258): 문신 유경 등이 무신 김준을 끌어들여 최의를 죽이고 몽고와의 강화 정책을 추진하였고, 김준은 문신 유경을 제거한 후 교정별감이 되어 권력을 장악하였다.

· 원종 즉위와 강화 조약(1259): 원종은 친몽정책을 추진하여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 몽골의 왕 입조 거부와 원종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고 임연에게 살해당했다(1268).

  (9) 임연(1268~1270)

· 김준을 제거하였으나 원종의 친몽 정책을 반대하여 원종이 폐위되도록 시도하였으나 실패했다.

· 원종은 개경환도를 하기 전 전민변정도감(1269)을 설치하였다.

· 동녕부 설치(1270, 개경환도 전): 자비령 이북의 땅을 원에 넘기고 최탄이 투항하자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였다. 

  (10) 임유무(1270)

· 임연의 아들인 임유무가 1270년 권력을 이어받은 후 계속 개경환도에 반대하다가 강화파(홍문계, 송송례 등)에게 살해당하고 무신정권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4) 개경환도 후(1270)

  원종

· 삼별초의 항쟁(1270~1273)

 ① 원인: 원종의 친몽정책과 굴욕적인 강화 및 고려정부의 환도에 반발하여 일어났으며 개경과 밀양 등에서 관노들과 농민들이 호응했다.

 ② 화도에서 반몽무인정권을 수립한 후 진도, 제주도에서 항전했다.

 ③ 삼별초는 민중의 지지를 받으며 지리적으로 이로운 강화도, 진도, 제주도를 중심으로 하여 장기항전이 가능했다.

 ④ 1273년 여몽연합군에게 진압되었고 원은 이후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목마장을 운영하였다.

※ 삼별초 항쟁
 · 화도: 개경 환도에 반발하여 배중손의 지휘 아래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 도: 배중손의 지휘 아래 진도로 이동하여 용장산성을 쌓아 저항하였으나 김방경이 이끄는 여몽 연합군에게 진압되었다.
 · 주도: 김통정의 지휘로 일부 세력이 제주도로 이동하여 항파두리성을 쌓고 저항을 하였으나 여몽 연합군에게 진압되었고, 원은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였다.

· 녹과전 지급(1271): 현직 관료들에게 수조권을 지급하였다.

· 결혼도감(1274): 공녀를 선발하는 기구인 결혼도감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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