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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의 건국 과정
후백제 건국(900, 완산주) → 후고구려 건국(901, 송악) → 마진으로 국호 변경(904, 후고구려) → 철원으로 천도(905, 마진) → 당 멸망(907) 후 5대 10국의 혼란기 → 태봉으로 국호 변경(911, 마진) → 요나라 건국(916, 거란) → 고려 건국(918, 왕건) → 송악 천도(919, 왕건) → 대야성 전투(920, 견훤의 신라 공격) → 발해 멸망(926, 대인선 때 거란족의 침략) → 공산(대구) 전투(927, 후백제 승리, 견훤의 신라 공격으로 경애왕 살해→신라가 고려에 도움 요청→고려 vs후백제→고려 신숭겸, 김락 등 전사) → 고창(안동) 전투(930, 고려 vs후백제, 고려 승)→발해 왕자 대광현의 고려 망명/운주성(운이랑) 전투-왕건의 승리(934)→견훤의 투항(935, 견훤의 첫째 아들 신검의 반란으로 견훤은 금산사에 유폐됐다가 탈출하여 고려에 투항함)→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김부)의 항복(935, 고려는 무력전쟁 없이 신라를 통합함)→선산(일리천) 전투(936, 고려(왕건+견훤) vs신검(견훤의 첫째 아들)→고려 승리 및 후삼국 통일(936)
- 907년 당이 멸망한 뒤 중국은 5대 10국의 혼란기였다. 후삼국의 분열과 민족 통일 전쟁에 중국 세력이 간섭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고려는 자주적으로 민족 통일이 가능하였다.
1. 후백제
1) 견훤
상주의 호족 이자개의 아들로, 전라도 지방의 군사력과 호족 세력을 토대로 완산주(지금의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부흥시킨다는 명분으로 후백제를 건국하였다.(900)
2) 세력의 범위
차령산맥 이남의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을 차지하여, 우수한 경제력을 토대로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였다.
3) 외교 관계
중국의 후당, 오월 및 일본 등과 외교 관계를 맺는 등 정치적으로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국제적 감각을 갖추었다.
4) 한계
견훤은 신라의 경애왕을 죽일 만큼 신라에 적대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나친 조세 수취로 민심을 잃었다. 또한 호족들을 포섭하지 못하며 호족들 간의 내분이 일어나 혼란스러운 상황에 형제들 간의 왕위쟁탈전과 고려와의 전투에서의 패배는 후백제를 멸망하게 하였다.
2. 후고구려
1) 궁예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신라 왕족의 후예로서 사회가 혼란해지자 북원(지금의 원주)의 양길(기훤의 부하)의 휘하에서 세력을 키워 양길을 몰아낸 후 송악(지금의 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후고구려를 건국하였다.(901)
2) 세력의 범위
고구려 부흥을 내세우며 강원도, 경기도, 황해도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3) 체제 정비
신라의 골품제를 폐지하는 대신 골품제도를 대신할 신분제도를 모색하였고 9 관등제를 실시하며, 국정을 총괄하는 광평성*, 내무·백관의 서무를 담당하는 내봉성을 설치하는 등 여러 관서를 설치하였다.
4) 한계
지나친 조세 수취와 미륵 신앙을 이용하여 전제 정치를 강화한 궁예는 백성의 신망을 잃고 918년 신숭겸 등이 일으킨 혁명으로 왕건이 새로운 왕으로 추대되었다.
· 후고구려의 국호·연호의 변천
수도 천도
국호
송악(901) 철원(905)
연호
후고구려(901) 마진(904) 태봉(911)
무태(904) 성책( 905) 수덕만세(911) 정개(914)
*광평성의 장관: 광치내
3. 고려
1) 왕건
- 송악 지방의 호족 출신 무장이면서 중국과의 해상무역으로 막대한 재력을 축적한 무역상인의 후예로 예성강 유역의 해상·군진 세력, 호족 세력 등을 기반으로 황해도와 경기도 연안의 해상권과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 궁예의 부하로 들어가 후백제의 금성(지금의 나주)과 진도 등 영산강 유역을 점령하며, 후백제의 중국 교통로를 차단하여 거점을 확보하였다. 이러한 공으로 광평성의 시중에 오르기도 하였다.
2) 고려 건국
폭정으로 민심을 잃은 궁예를 축출하고 왕으로 추대된 왕건은 고려를 건국(918)하였으며, 연호를 천수라고 하였다. 빈번한 반란으로 이듬해 수도를 철원에서 송악으로 천도(919)하였다.
3) 외교 및 정책
- 중국의 5대와 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신라와도 적극적인 우호 정책을 펼쳤다.
- 발해가 거란의 침략으로 멸망(926)하자 발해의 왕자 대광현 등 고구려계 유민들은 고려로 투항하였고, 태조는 이를 우대하여 동족의식을 분명히 하였다.
- 신라는 경순왕이 왕위에 올랐으나 돌아선 민심과 많은 침략(vs 백제)으로 인해 경순왕(김부)의 항복(935)을 받아 전쟁 없이 신라를 통합하였다.
- 반면 후백제와는 대립적인 관계였는데 공산 전투(대구, 927)에서 왕건의 패배, 그 후 고창 전투(안동, 930), 운주성(홍성, 934), 선산 전투(936)에서 왕건이 승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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