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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한국사] 고대문화 - 1. 사상

펭키라_HK 2023. 9. 11.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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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대 문화 초기 지배층에게는 시조 신앙이 민간에는 샤머니즘과 점술이 널리 퍼져 있었다.
고구려: 동명성왕, 하백신, 부여신 숭배
백제: 동명신, 구태신 숭배
신라: 박혁거세 시조묘 건립
민간: 천신, 산신, 해신, 일월신 등 자연신 숭배 및 자체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 삼국이 중앙 집권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러한 초부족적 사상을 통일해야 했고 그 방법으로 불교를 수용하여 지배질서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 왕실에서 불교 수용에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기에 삼국의 불교는 왕실 · 귀족 중심의 불교였다.
  • 왕실 불교로 호국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 내세적 성격보다 현세에 구복을 구하는 현세구복적인 성격을 띤다.
  • 불교는 새로운 국가 정신 확립에 기여(왕권 강화)하였고 선진 문화를 수용하면서 새로운 문화 창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 삼국 불교의 수용

고구려 백제 신라
소수림왕(372) 침류왕(384) 전래: 눌지왕(457) 고구려의 묵호자
전진의 순도와 아도 동진의 마라난타 공인: 법흥왕(527) 이차돈의 순교가 계기

2. 삼국 불교의 발전

고구려 백제 신라
순도에 의해 전파된 삼론종 발달 
고구려의 승랑은 체계화하여 중국 삼론종 발달에 기여함.(삼론종의 3대조)
계율종 중심으로  발달
(율종, 계율 중시)
왕권과 밀착하여 성행하였다.
업설, 왕즉불 사상, 미륵불 신앙 성행
계율종, 열반종 등 유행
혜량(6세기): 고구려→ 신라, 진흥왕 때 최초의 승통이 되어 백고좌회와 팔관회를 주관 아직기(4세기,근초고왕): 일본 태자 토도치랑지의 스승이 되어 한자를 교육함 진흥왕: 고구려 승려 혜랑을 국통으로 삼고 그 아래 주통, 군통을 두어 교단을 조직
혜자(6세기 말, 영양왕): 일본의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됨 왕인(근초고왕): 천자문과 논어를 전하고 교육함, 군신들에게 경전을 가르침 원광(진평왕): 수에서 열반종 깨우침, 화랑도 세속5계, 수에 보내는 걸사표지음
담징(7세기, 영양왕): 백제를 거쳐 일본으로 가 종이와 먹 제조법을 전하고, 호류사(법륭사) 금당벽화를 그림 단양이·고안무(6세기, 무령왕): 일본에 유학 전파 자장(선덕여왕): 대국통에 임명, 계율종 개창, 
자장의 건의로 황룡사 9층 목탑 건립(백제 건축가 이비지 축조)
혜관(영류왕): 일본에 불교전파, 일본 삼론종의개조 겸익(6세기, 성왕): 인도에서 율종 불경을 가져와 번역  
보덕(보장왕): 백제 완산주로 건너가 열반종 강론 노리사치계(552, 성왕): 일본에 불상과 불경 등 최초로 불교 전파 호국불교에 해당
도현(7세기, 보장왕): 연개소문의 도교 장려책으로 일본에 건너가 불법을 저수하면서 반고구려 입장인 <일본세기> 저술 · 혜총(6세기, 위덕왕): 고구려 혜자와 함께 일본쇼토쿠 태자의 스승, 계율종 전파
· 아좌태좌: 쇼토쿠 스승, 그림(초상화)전수
· 불국토 사상: 왕이 지배하는 땅은 부처님 땅
· 인왕경: 나라를 보호하는 내용
승랑: 중국에 건너가 삼론종 발전에 기여 · 관륵(7세기, 무왕): 천문, 역서, 지리에 관한 책등을 전함, 관륵의 건의로 일본의 승직 제도를 최초로 시행, 달력
· 미마지(7세기, 무왕): 중국에서 기악무를 익히고 돌아와 일본에 전파
· 팔관회: 토속신앙에 토대를 둔 것으로 승려가주관하면서 제천행사와 불교의식이 결합하여 호국적인 의식이 되었음. 국가와 왕실의 태평을 기원하는 의식. 외국 상인과 사신들의 무역의 장이 되기도 함
수산리 고분 벽화→일본의 다카마쓰 고분 벽화에 영향을 미침 일본 고류사 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호류사 백제 관음상 제작에 영항을 주었다. 왕흥사: 백제 무왕이 호국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왕흥사 건립
  5경박사, 의박사, 역박사, 천문박사, 채약사 및화가, 공예기술자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이들에의해 목탑이 세워지고 백제 가람 양식(사원)이 생겨났다. · 사천왕사: 문무왕 때 당병의 내침을 물리치고고구려와 백제의 옛 땅을 통합하겠다는 의지
·감은사: 문무왕이 시작하여 신문왕 때 완공. 신라를 보호하기 위한 기원이 담김
·  황룡사9층탑: 높이 70m로 아홉 나라를 굴복시킨다는 믿음(몽고 침입때 소실)

3. 통일 신라 

  • 통일 신라의 불교는 철학적 불교, 학문적 불교로 발전하였다.
  • 신라 지역에서는 화엄종이 백제지역에서는 법상종이 유행하였으며, 불교가 대중화되어 밀교가 유행하였다.
원효(설서당, 617~686) 의상(625~702)
6두품 출신으로 무열왕· 문무왕 때 주로 활약하였다. 진골 출신, 문무왕의 정치적 자문을 맡았다.
661년 의상과 유학길에 올랐으나 일체유심조(모든 것이 내 안에 원인이 있기에 답을 밖에서 구할 수 없다.)를 깨닫고 당 유학을 중단하였다. 당 유학 시절 지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태종 무열왕의 딸, 요석 공주와 결혼하여 아들 설총을 낳은 후 스스로 파계하였다. 독창적인 해동 화엄종을 창시하고 원융사상을 설파하였다.
파계승이 된 원효는 스스로 소성거사, 복성거사라 자처하며 무애가를 만들어 불교 대중화에 노력하였다. 모든 존재가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화엄사상을 정립하였다.
아미타 신앙(정토종) - "누구나 '나무아미타불'만 염불하면 극락으로 왕생할 수 있다"-를 전도하며 불교 대중화를 이끌었다.  일즉다 다즉일: '하나가 곧 만물이고, 만물이 곧 하나다' 라는 독특한 논리를 펼치며 전제 왕권 강화에 기여하였다.
화쟁사상, 일심사상 주장: 민중 중심의 평등 · 화합을 강조하였고, 모든 진리는 하나의 진리를 향해있다는 뜻의 일심은 원효의 모든 사상의 근본이다. 이러한 사상을 중심으로 중관파와 유식파의 사상적 대립을 비판하며 통합을 시도하였다. 아미타(내세) 신앙과 함께 현세에서 고난을 구제받고자 하는 관음 신앙으로 불교를 대중화하고자 하였다.
교종의 종파 중 하나인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법성종(경주 분황사)을 개창하였다. 영주 부석사, 양양 낙산사 등 사원을 창건하였다.
<대승기신론소> <십문화쟁론> <금강삼매경론> <화엄경소> <열반종유> <아미타경소> 등을 저술하였다. <화엄일승법계도> <법계도> <법성계> 등을 저술하였다.
화엄사상의 핵심 요체를 그림과 글씨(210자)로 요약함
입적 후 애장왕 때 원효의 추모비인 '고선사 서당화상비'가 건립되었다. 교단을 세우고 제자를 양성하였다. (의상십철)
고려 숙종 때 화정(화쟁)국사로 추앙되었다. 고려 숙종 때 해동화엄시조 원교국사로 추앙되었다.
세계 모든 것은 공이다. 모든 현상은 식이다. 원융무애, 이사무애
무애가: 어디에도 걸림이 없다. 화엄경을 쉽게 풀이한 것이다.
정토종: 아미타불이 사는 내세의 존재를 믿고 죽은 후 내세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불교의 한 종파이다.

 

원측(613~696)

  • 문무왕 때 당의 현장에게 유식 불교를 배웠다. 
  • 현장의 사상을 계승한 당의 승려 규기와 논쟁을 하며 당 수도의 서명사에서 서명학파를 형성하였다.
  • 효소왕 때 원측의 제자 도증이 신라에 원측의 유식학을 전파하였다.
  • <해심밀경소>, <성유식론소>, <주별장> 등을 저술하였다.

 

김교각(696~794)

  • 성덕왕의 아들로 당에 건너가 안휘성 구화산에서 포교활동을 하며 화엄경을 설파하였다.
  • 입적 후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평가되었다.

 

진표(법상종)

  • 경덕왕 때의 승려로 불교 대중화를 위해 점찰 법회를 열며, 내세와 현세를 모두 구제해준다는 미륵신앙을 주장하였다.

 

혜초(704~787)

  • 중국에서 인도 승려에게 밀교를 배웠고 인도의 불교유적을 답사한 후 인도와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의 풍물을 기록한 <왕오천축국전>을 저술하였다.
  • 1908년 프랑스 학자 펠리오가 중국 둔황 천불동에서 발견하였다.
  • 현재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소장되어있다.

 

4. 발해의 불교 

  • 왕실 귀족 중심의 불교였으며, 고구려 불교를 계승하였다.
  • 수도 상경에서 10여 개의 웅장한 절터와 불상이 발견되었는데 불교가 융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문왕이 전륜성왕(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 불교적 이상 군주)이라 자처하였다.

 

삼국시대 불교 인물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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