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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한국사] 고대 사회

펭키라_HK 2023. 9. 11.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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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 사회

    1) 신분 제도

        (1) 삼국 시대 이전(부여, 초기 고구려, 삼한)

  • 부족의 통합 과정에서 지배층 사이의 위계서열이 마련되고, 이것이 신분제도로 발전해갔다.
  • 가 · 대가
    • 부족장 세력으로 호민을 통해 읍락을 지배하고 자신의 관리와 군사력을 지니고 정치에 참가했다.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귀족으로 편제되었다.
  • 호민
    • 경제적으로 부유한 계층으로 고구려 호민은 좌식자로 전사 집단이기도 했다.
  • 하호
    • 농업에 종사하는 평민으로 부여의 하호는 전쟁 시 식량을 공급하기도 하였다.
  • 노비
    • 읍락의 최하층에 존재한 집단으로 주인에게 예속되어 생활하는 천민층이다.

         (2) 삼국 시대

  • 신분적 차별은 법적으로 더욱 강한 구속력을 형성하였고 지배층은 율령을 제정하여 특권을 유지하였다.
  • 개인의 능력보다 신분이 중요시되어 신분에 따라 일상생활에서 관직에 이르기까지 많은 차별이 있는 폐쇄적인 사회였다.
  • 신분 구성
    • 귀족
      • 왕족을 비롯하여 옛 부족장 세력이 중앙의 귀족으로 재편성되어 특권을 향유하였다.
    • 평민
      • 대부분 농민으로 자유민이었으나 정치적, 사회적으로 많은 제약이 있었으며 조세, 공납, 역을 부담하였다.
    • 노비
      • 천민 집단으로 왕실과 귀족 및 관청에 예속되어 신분의 구속을 받았다.
      • 주인의 집에서 시중을 들며 생활하거나 주인과 떨어져 살며 주인의 땅을 경작하기도 했다.
      • 전쟁포로, 죄를 지은 사람, 귀족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한 사람들도 노비로 전락하였다.
      • 전쟁이 빈번한 삼국시대에는 노비가 많았으나 통일신라 이후 전쟁 노비는 점차 소멸하였다.

 

    2) 삼국 사회 모습

        (1) 고구려

  • 압록강 중류 유역에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산간지역이라 식량생산이 충분하지 않아 일찍부터 대외 정복이 활발했으며 기풍이 씩씩하였다(상무적 기풍: 말타기 활쏘기를 즐김).
  • 지배층
    • 왕족 고씨를 비롯한 5부 출신의 귀족들로 정치를 주도하며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누렸다. 
※ 5부 구성
계루부(왕족), 절노부(연나부, 왕비족)
소노부(연노부), 관노부, 순노부
소노부에서 왕이 나오다가 태조왕 때부터 계루부가 왕위를 독점하였다.

 

  •  법률
    • 통치 질서와 사회 기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형법을 매우 엄격하게 시행하였다.
    • 반역자: 반역을 꾀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자는 화형에 처한 후 다시 목을 베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 적에게 항복하거나 전쟁에서 패배한 자: 사형에 처한다.
    • 도둑질한 자: 12배를 배상하는 1 책 12 법을 적용하였다.
  • 혼인 풍습
    • 지배층
      • 전쟁미망인을 보호하면서 남편 집안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형사취수제가 있는데, 고국천왕 사후 왕후 우 씨가 고국천왕의 동생인 연우(산상왕)와 결혼한 것이 대표적이다.
      • 사위가 처가의 집에서 지내면서 자식을 낳아 자식이 장성하면 아내를 데리고 남편의 집으로 돌아가는 제도로 노동봉사의 서옥제가 있었다.
    • 평민층
      • 자유연애 결혼이 일반적이었으며, 남자 집에서 돼지고기와 술을 보냈다. 신부집에서 다른 예물을 받으면 딸을 팔았다고 여겨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2) 백제

  • 언어, 풍속, 의복은 고구려와 큰 차이가 없었다.
  • 말타기, 활쏘기를 즐기는 상무적인 기풍을 지녔다.
  •  지배층
    • 왕족 부여씨와 8성의 귀족(진 해 사 목 국 연 협 백 씨)으로 이루어져 있다.
    • 중국 고전 및 역사책을 즐겨 읽고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하였으며, 관청 실무에도 밝았다.
    •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투후와 바둑, 장기 등의 오락을 즐겼다.
  • 법률
    • 반역 · 전쟁에서 퇴각한 자나 살인자는 목을 베었다.
    • 도둑질한 자는 귀양 보냄과 동시에 2배를 배상하도록 하였다.
    • 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국가 재물을 횡령한 경우 3배를 배상하고 죽을 때까지 금고형에 처한다.
    • 간음한 여자는 남편 집의 노비로 삼았다.

        (3) 신라

  • 화백회의 
    • 신석기시대의 씨족사회 전통을 계승한 제도며 임시 기구이다.
    • 의장은 상대등이며 4영지(청송산, 오지산, 금강산, 피전)에서 회의를 하였다.
    • 만장일치의 귀족 합의제로 집단 간 부정 방지와 결속을 강화하는 기능을 하였다.
    • 귀족의 단결과 왕권을 견제하며 국왕과 귀족 간의 권력을 조절(계급 간 갈등 완화)하는 기구였다.
진지왕은 '정치가 어지럽고 음란하다.'는 이유로 화백회의에 의하여 폐위되었다.

 

  • 화랑도 
    • 원시 사회의 청소년 집단에서 기원(씨족 사회의 전통)하였다.
    • 여성 중심의 단체 '원화'가 진흥왕 때 국가적 조직으로 개편되었다.
    • 귀족 자제 중에서 선발된 화랑(단장, 낭도의 추대로 선임)과 귀족부터 평민까지 포함된 낭도로 구성되었으며 군사 양성의 기능이 있다.
    • 평민부터 귀족으로 구성이 되어있어 계층 간의 대립과 갈등을 조절 · 완화하는 기능을 하였다.
    • 행동 규범으로 진평왕 때 원광 법사가 제시한 세속 5계가 있다.
    • 두 화랑의 충성과 신의를 서약한 금석문으로 유교사상과 화랑정신이 반영된 임신서기석(진평왕)이 있다.
    • 최치원의 난랑 비문: 화랑인 난랑의 행적과 화랑에 대한 간략한 지적이 남아있는 사료로써 유 · 불 · 선 3교의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으며 화랑도를 현묘의 도, 풍류라고 하였다.
※ 세속 5계
화랑의 실천 윤리로 유교, 불교, 도교가 복합되어있다.
사군이충(유교사상), 사친이효(유교사상), 교우이신(유교사상), 살생유택(불교사상), 임전무퇴(도교사상)
임금에게 충성하기, 부모에게 효도하기, 신의로 벗을 사귀기, 살아있는 것을 함부로 죽이지 않기, 전쟁터에서 물러나지 않기.

 

  • 골품 제도의 특징
    • 족장 세력을 중앙 귀족으로 흡수 및 편제하는 과정에서 성립된 신분제로 왕경과 소경의 귀족들을 대상(지방민은 골품제 적용을 받지 않음)으로 하였다. 
    • 골품 제도는 엄격한 신분제도로 개인의 사회 · 정치 활동뿐만 아니라 가옥 규모, 장식물, 복색 등 일상생활에까지 규제를 받았다.
    • 관등 승진의 상한선이 골품(신분)에 따라 제한되었다.
    • 관등에 따라 복색이 결정되었다. (골품의 영향을 받긴 했으나, 골품에 따라 복색이 결정된 것은 아니다.)
    • 진골은 모든 관등에 임명이 가능했으며, 1~5 관등을 독점하였으며, 자색 공복을 독점하였다.
    • 각 부의 장관인 령, 집사부의 중시 · 시중(지방 관리), 장군은 진골만이 임명될 수 있었다.
    • 6두품은 득난이라고도 불렸는데, 대족장 출신으로 6 관등(아찬)까지 승진이 가능했다.
    • 6두품의 신분 불만은 처음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 중위제(특진 제도)로 골품제를 보완하고자 하였으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 통일 이후 3두품~1두품은 소멸되어 평민 혹은 백성으로 평민화되었다.      

2. 남북국의 사회

  • 삼국 통일은 삼국이 지니고 있던 혈연적 동질성과 문화적 공통성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 문화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 전쟁 과정에서 백제와 고구려의 옛 지배층에게 신라의 관등을 주어 포용함과 동시에 통일 후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을 9 서당에 편성하여 유민들을 포용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 신라의 지배층은 일통삼한(삼국이 하나가 됐다)의 자부심이 형성되었다.

    1) 통일신라

        (1) 도시의 발달

  • 경주(금성)
    •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로 귀족들이 모여 살았으며 국제 무역품들이 모여드는 대도시였다.
  • 5 소경
    • 지방의 문화 중심지로 옛 백제, 고구려, 가야의 일부 지배층은 물론 신라의 수도에서 이주한 귀족들이 거주하였다.

        (2) 귀족의 생활

  • 주거
    • 금입택이라 불린 저택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 계절에 따라 즐기는 진골귀족들의 별장인 사절유택이 있었다.
  • 수입
    • 지방에 소유한 대토지와 목장 등에서 발생하는 수입과 서민을 상대로 고리대업을 하였다.
    • 국제무역을 통하여 들어온 향료, 장식품, 비단 등 사치품을 선호하였다. 이로 인해 흥덕왕 때 사치 금지령이 내려졌다.

        (3) 농민의 생활

  • 자신의 토지를 경작하며 근근이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가난한 농민들은 귀족의 토지를 빌려 생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 귀족들이 농장을 확대해가자 자영농이 몰락해갔으며 귀족들의 세금까지 부담하거나 빚을 갚지 못하여 노비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 진성여왕 때 중앙에서 과도한 조세를 부과하자 농민들의 반란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 지금 군읍은 모두 도적의 소굴이 되었고, 산천은 모두 전쟁터가 되었으니 어찌 하늘의 재앙이 우리 해동에만 흘러드는 겁니까. -동문선, 서거정-

◎ 당나라 소종 황제가 중흥을 이룰 때, 전쟁과 흉년이라는 두 재앙이 서쪽에서 그치고 동쪽으로 오니 굶어서 죽고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늘어 있었다.  -해인사 묘길상탑기, 최치원-

 

▷ 신라 하대의 반란 참조

2022.11.12 - [한국사] - 신라 말기의 사회 · 정치 변동

 

신라 말기의 사회 · 정치 변동

1. 신라 말기의 사회 변동 진골 귀족들은 골품제에 집착하면서 족당을 형성하여 왕위쟁탈전을 시작하면서 왕권은 약화되고, 상대등의 세력이 강화되면서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지배층의 녹읍

pengkira.tistory.com

 

    2) 발해

        (1) 계층 구조

  • 지배층
    • 왕족인 대씨와 고씨, 양씨, 장씨 등 고구려계 귀족과 일부 말갈족으로 구성되었다.
  • 피지배층
    • 발해의 주민 다수는 말갈인이며, 고구려 전성기 때부터 고구려에 편입된 종족이다.
    • 이들 중 일부는 지배층이 되거나 촌락의 우두머리가 되어 국가 행정을 보조하였다.

        (2) 사회 모습

  • 당의 제도와 문화를 수용하여 고구려와 말갈 사회의 전통적인 생활 모습을 유지하였다.
  • 당을 통해 전래된 타구와 격구 놀이가 유행하였고, 발해 사신 왕문구 일행은 889년 일본에 가서 격구를 하였다.
  • 발해의 지식인은 당에 유학(도당 유학)하여 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과거시험인 빈공과에 응시하여 신라인과 수석을 다투기(등제 서열 사건)도 했다.
  • 발해의 여성은 지위가 비교적 높은 편이었는데 여사라는 여성 교사의 개인 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 일부일처제가 일찍부터 확립되었고, 무덤은 부부 합장묘가 많았다.
부인 모두 사납고 투기가 심하다.
오직 이 나라만 작은 부인 또는 시중드는 계집종이 없다. -송막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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