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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발해(남 · 북국 시대)

  • 고구려 유민들이 요동을 거점으로 당에 지속적인 저항을 하자, 당은 보장왕을 요동 도독으로 임명하고 소고구려국(친당)을 세워 무마하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역효과를 초래하였다. 
  • 696년 거란족 이진충이 당나라에 일으킨 반란을 틈타 대조영을 중심으로 고구려 유민, 말갈 집단이 만주 동북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 대조영이 길림성 돈화현 동모산 기슭에 '진'을 건국(698)하였다.
  • 이로써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공존하는 남북국시대가 출현하였다.

    1) 고왕 (대조영, 698~719)

  • 거란족 이진충의 난(696)을 틈타 만주 동북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 길림성 돈화현 동모산 기슭에 '진'을 건국(698)하였다.
  • 연호를 천통이라고 하고, 당나라 현종에게 발해군왕으로 책봉되면서 국호를 발해로 변경(713)하였다.

    2) 무왕 (대무예, 719~737)

  • 연호를 인안으로 하였다.
  • 영토 확장에 힘을 쓰며 동북방의 여러 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였다.
  • 발해는 당과 신라를 견제하며, 돌궐 · 일본 등과 외교하여 동북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하였다.
  • 무왕의 대외 관계 
    • 대립
      • 신라: 발해의 영토 확장으로 두려움을 느낀 신라는 강릉 이북에 장성(712)을 쌓았다. 당의 요청으로 성덕왕이 발해를 공격(733)하였다.
      • 흑수부 말갈: 당과 연결을 시도하였다.
      • 당: 흑수부 말갈과 당이 연계하여 발해에 대비하려하였으나, 발해의 장문휴가 산둥반도 등주(덩저우)를 선제공격(732)하였다.  요서 지역에서 당군과 격돌하였다.
    • 친교
      • 돌궐: 발해와 연맹 관계를 유지하며 당을 견제하였다.
      • 일본: 일본에 고구려 계승을 표방한 국서를 전달하여 일본과 처음 통교를 하였다.
고구려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이어받았다.

    3) 문왕 (대흠무, 737~793)

  • 대흥 · 보력의 연호를 사용했다.
  • 내치와 외교에 치중하였다.
  • 당나라 중기에 안녹산과 사사명이 일으킨 반란(안 · 사의 난, 756~763)을 틈타 요하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 남쪽으로는 신라와 접하였으며, 북쪽으로는 흑수부 말갈까지 이르렀다.
  • 당과 친선관계를 맺어 당제를 수입하거나 유학생을 파견하였다. 당은 문왕을 발해국왕(762)으로 인정하였다.
  • 당의 영향을 받아 3성 6부제와 주자감을 설치하였다.
  • 스스로 불교적 성왕(전륜성왕,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으로 자처하며, 황상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 일본에 국서를 보내 발해가 천손임을 과시하고, 본인을 고려국왕이라 칭하며 고구려 계승 의식을 나타냈다.
  • 신라와도 상설교통로(신라도)를 개설하였다. 자주 이용된 것은 8세기 후반~ 9세기 전반까지이다.
※ 발해의 천도
동모산 → 중경 현덕부 → 상경 용천부(문왕, 755) → 동경 용원부(문왕, 785) → 상경(성왕)

    4) 선왕(10대, 대인수, 818~830)

  • 연호를 건흥으로 하였다.
  • 대조영의 아우인 대야발의 4대손으로, 왕의 계보가 대야발 직계로 바뀌었다.
  •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하고 요동지역으로 진출하여 옛 고구려 땅을 회복하였다.
  •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접할 정도로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 5경 15부 62주의 지방 제도를 완비하였다.
  • 넓은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지방의 중심에 5개의 중심도시를 두었는데 이것이 5 경이다. 문왕 때 상경 · 중경 · 동경, 선왕 때 남경과 서경을 추가 설치하여 5경을 완성하였다.
  • 최대 전성기로써 당이 해동성국이라고 불렸다.

* 무왕대에 동북방에 진출하여 북만주 일대와 요동을 장악하였다 (X, 요동 장악은 선왕)

※ 발해와 신라의 경쟁 관계 [당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
- 쟁장 사건(897): 당에 간 발해 사신이 신라 사신보다 윗자리에 앉을 것을 청하다 거절당한 사건
- 등제 서열 사건(906): 신라의 최언위와 발해의 오광찬의 빈공과 순위 다툼

    5) 애왕(대인선, 906~926)

  • 거란의 태조는 925년 12월 말에 야율아보기를 보내 발해를 공격하게 하였고, 926년에 상경의 홀한성이 함락되었다.
  • 발해 멸망 후 발해의 땅에 거란이 동단국(926~936)을 건설하였다.
 ※ 발해의 부흥 운동(약 200년 동안 곳곳에서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 후발해(929~936): 발해 유민이 압록강 유역에서 세웠으나 내분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대광현이 고려에 귀순(934)하였다
 - 정안국(936~986): 열만화의 정안국으로 열씨가 중심이 되어 세워 송과 연대하여 거란에 협공을 시도하였으나, 거란에 의해 멸망하였다.
 - 흥료국(11세기 초)
 - 대원국, 오사국, 고욕의 저항 등이 있다.

※ 발해 5도

구분 교통로
일본도 상경용천부 → 동경용원부 → 일본
신라도 상경용천부 → 동경용원부 → 남경남해부 → 신라
조공도 서경압록부 → 해로 → 당
영주도 장령부 → 영주
거란도 부여부 → 거란

 

※ 발해사 연구 서적

  •  고려 시대
    • 일연 <삼국유사>: 현존 최고(古) 문헌이나 발해를 말갈족으로 인식하고 있다.
    • 이승휴 <제왕운기>: 발해를 최초로 우리 역사 속에 편입하였다.
  • 조선 후기
    • 유득공 <발해고>: '남북국'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 한치윤 <해동역사>: 발해를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와 같은 비중으로 다루었다.
    • 정약용 <아방강역고>: 발해사를 우리 민족사로 다루었다.
    • 안정복 <동사강목>: 발해를 말갈의 역사로 기록하였다.
    • 이종휘 <동사(史)>: 발해를 고구려의 후계자로 인식하였다.
  • 구한말
    • 장지연 <대한 강역고>: 정약용의 <아방강역고>를 현대식으로 증보하였다.
  • 일제 강점기
    • 신채호 <조선상고사>: 발해, 신라 양국 시대론을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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