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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일 신라 (남 · 북국 시대)

    1) 신라 중대의 정치

  • 무열왕 ~ 혜공왕 (삼국사기 구분에 의함): 무열계 진골의 왕위 세습
  • 왕권의 강화
    • 국왕과 집사부(시중) 중심의 정치
    • 6두품(행정실무 담당, 국왕의 정치적 조언자)의 역할 증대
    • 화백회의(상대등)의 권한 약화
    • 13개 관부를 병렬적 독립기관으로 하였으며, 각 부의 장관은 여러 명이었다.

        (1) 무열왕 (김춘추, 654~661)

  • 김유신의 후원을 받은 김춘추는 상대등 비담의 반란을 진압하고 상대등 알천을 견제하여 최초의 진골 출신 왕이 되었다.
  • 무열 왕계 진골 직계 자손이 왕위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 백관들을 감찰하는 감찰 담당 기구인 사정부를 설치(659)하였다.
  • 백제를 정복하였다. (660)
  • 집사부 시중의 권한을 강화하여 상대등 세력을 억제하여 진골 귀족세력을 약화하였다.
  • 왕족들에게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하던 갈문왕 제도를 폐지하였다.
  • 불교식 왕명에서 중국식 시호 '태종'을 사용하였다.
  • 강원도 삼척에 북진(군진: 국경수비를 위해 설치한 군사거점 조직)을 설치하였다.

        (2) 문무왕 (661~681) '병기를 녹여 농기구로 ~, 천수~ '

  • 주의 장관인 군주를 총관으로 개칭(661)하였고, 이후 원성왕이 도독으로 개칭(785)하였다.
  • 백제 저항군의 진압과 고구려 정복(668), 당나라 군대를 축출하는 등의 삼국통일을 완성(676)하였다.
  • 지방을 감찰하기 위해 외사정(673)을 설치하였다.
  • 안승을 보덕국왕으로 삼았다. 
  • 지방에 북원소경과 금관소경을 설치하였다.  

        (3) 신문왕 (681~692)

  • 신문왕 즉위 해에 장인 김흠돌이 일으킨 반란(681)을 계기로 진골 귀족을 숙청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 보덕국왕 안승을 진골귀족(3 관등 소판)으로 편입시키고 경주로 이주(683)시켰다. 금마저에서 대문의 난(684)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여 모든 영역을 신라의 지배하로 두었다.
  • 문·무 관리에게 수조권을 주는 관료전을 지급(687)하고 녹읍을 폐지(689)하여 귀족 경제의 기반을 약화시켰다.
  • 전국을 9주로 나누고, 특수행정구역에 5 소경을 설치하여 지방 행정 조직을 완비하였다.
  • 중앙군을 9 서당으로, 지방군을 10정으로 정비하였다.
  • 공장부와 예작부를 설치하여 중앙 관제를 14부로 완성하였다.
  • 유교 정치 이념 확립과 유학 교육을 위하여 국학을 설치(682)하여 인재를 양성하였다.
  • 동해에 감은사를 창건(682)하고, 감은사 앞바다에 떠다니는 섬에서 대나무를 잘라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신라의 국태 안민과 왕실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염원을 상징하는 것이다. (대왕암(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유해를 묻은 동해의 대석), 이견대(대왕암이 보이는 곳에 누각을 짓고 이견대라고 현판을 지었다.))
  • 왕권 강화와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수도를 달구벌(대구)로 천도하려고 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4) 효소왕 (692~702)

  • 신문왕의 아들로서, 일길찬 김흠운의 외손자이다.
  • 지증왕 때 설치한 시장 관리 관청인 동시전이 있었는데, 통일 후 시장이 더욱 활성화되어 서시와 남시를 설치하고 이를 감독하는 서시전과 남시전도 설치(695)하였다. 이 시기에 대조영이 진국(훗날 발해)을 건국하였다.

        (5) 성덕왕 (702~737)

  • 통일신라기 전성기이다.
  • 당의 현종과 국교를 재개하였고 사실을 자주 파견하였으며, 당의 요청으로 발해를 공격하기도 했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당나라는 대동강~원산만을 신라의 영토로 인정하였다.
  • 일본과 친교를 맺고 견신라사를 파견하였다.
  • 제사를 관장하는 전사서를 설치(713)하였다.
  • 당나라로부터 공자와 72 제자들의 화상을 들여와 국학에 안치(717)하여 유교 교육기관임을 확실히 하였다.
  • 누각(물시계) 제작 및 누각전을 설치(718)하였다.
  • 농민 경제를 안정화하고 토지 및 백성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정전(722)을 지급하였다.
  • 관료들이 지켜야 할 덕목을 제시한 백관잠을 지었다.
  • 상원사 동종을 주조하였다. (725)

        (6) 경덕왕 (742~765)

  • 일본과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으나 당과는 친교관계를 통해 원만한 관계를 이루었다.
  • 왕권의 재강화를 위해 한화 정책을 중심으로 전국 지명과 관직명을 중국식으로 개칭하였다.
  • 집사부 중시를 시중으로 격상하였다.
  • 국학을 태학감으로 개칭하고 제업박사와 조교를 두어 유학 교육을 강화하였으며, 천문학, 누각, 율령박사를 두어 기술분야 발전에도 힘썼다.
  • 녹읍이 부활(757)하여 사원의 면세전이 늘어나면서 국가재정의 압박과 농민 부담이 가중되면서 전제 왕권이 동요되었다.
  • 당과의 교류로 당 문화를 수입하고 문화적으로 전성기를 이루었다.
    • 김대성에게 석굴암과 불국사를 창건하도록 하여 창건을 시작하였고, 혜공왕 때 완성되었다.
    • 성덕대왕 신종(우리나라 최대종, 에밀레종, 봉덕사종) 주조를 시작하기 시작하였고, 혜공왕 때 완성되었다.
    • 만불산을 제작하여 당 나라에 헌상하였다.
    • 월명사가 '제망매가', '도솔가'를 지었다.
    • 충담사가 '찬기파랑가', '안민가'를 지었다.

       (7) 혜공왕 (765~780)

  • 혜공왕이 8세에 즉위하자 왕권은 약화되었다. 768년 대공·대렴(96 각간의 난)의 난을 시작으로 한 귀족의 난(김양상의 권력 장악(774)→ 김지정의 난(780)→혜공왕 피살→김양상(훗날 선덕왕), 김경신(훗날 원성왕)이 김지정을 진압하고 왕이 되었다.)으로 내물왕계 김양상이 왕위에 올라 태종 무열왕계 왕위 세습은 단절된다.
  • 귀족 연합의 신라 하대 사회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 석굴암과 불국사, 성덕대왕 신종 완성.

    2) 신라 하대의 정치

  • 국왕 · 시중 · 6두품의 권한이 약화되었고, 상대등 · 진골(족당을 형성하여 왕위쟁탈전 벌임) 귀족의 세력이 강화되어 사회사 혼란스러웠다.
  • 6두품은 지방호족세력, 불교 선종 세력과 연합하여 반신라화 개혁을 시도하였다.

        (1) 선덕왕 (김양상, 780~785)

  • 내물왕계 김양상이 선덕왕에 즉위하면서 신라하대가 시작되었다.
  • 귀족 연립 정권으로 귀족 내부의 갈등은 여전하였다.
  • 황해도에 패강진(782)을 설치하였다.

        (2) 원성왕 (김경신, 785~798)

  • 상대등 김경신이 무열계 김주원을 제치고 원성왕으로 즉위하였다.
  • 최초의 관리 선발 제도로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독서삼품과를 실시(788)하였으나, 진골귀족의 반발과 골품제의 모순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3) 소성왕 (799)

  • 청주 거노현을 국학생 녹읍으로 지급하였다.

        (4) 헌덕왕 (809~826)

  • 도의가 당에서 남종선을 도입하여 귀국하였다. (821)
  • 웅천주(공주) 도독 김헌창의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국호를 장안, 연호를 경운이라고 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문신인 녹진이 반란을 진압하며 실패하였다.
  •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825)도 경기도 여주에서 한주의 고달산 산적 수신과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 이후 무열계 진골은 6두품으로 강등되었다.

        (5) 흥덕왕 (826~836)

  • 장보고의 건의로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828)
  • 집사부를 집사성으로 개칭하였다.
  • 이 시기에 당의 사신으로 파견된 김대렴이 차나무 종자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었다.
  • 사치금지령을 내렸다.(834)

        (6) 문성왕 (839~857)

  • 김우징과 김양의 난이 발생(838)하였는데 장보고가 김우징을 도왔으며, 신무왕이 즉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 청해진대사 장보고는 딸이 왕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난(장보고의 난, 846)을 일으키게 되었고, 이에 문성왕은 염장에게 장보고를 암살하도록 했다. 청해진은 염장의 관리하에 있다가 851년에 폐지되었다.

        (7) 진성여왕 (887~897)

  • 삼대목 편찬(888): 대구 화상, 위홍이 편찬한 향가집으로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 사벌주(상주)에서 원종과 애노가 정부의 강압적인 조세 수취에 반발하여 반란(889)을 일으켰다.
  • 견훤이 무진주를 점령(892)하여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 궁예가 양길의 부하가 되어(892) 명주를 공격(894)하였다.
  • 6두품 최치원이 시무 10여 조를 건의(894)하였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 적고적(붉은 바지 도적)의 난이 일어났다. (896)
  • 합천 해인사 길상탑을 건립하였다. (895, 탑지는 최치원이 지었다.)

        (8) 신덕왕 (912~917), 경명왕 (917~924), 경애왕 (924~927)

  • 박 씨 성의 왕이 즉위하였다.

        (9) 경순왕 (김부, 927~935)

  • 견훤의 공격으로 포석정에서 경애왕이 피살(927)당한 후 즉위하였다.
  •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 신라가 멸망한 후에 고려의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고 경주를 식읍으로 받아 최초의 사심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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