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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 아이엠그라운드 27명 소개하기.
※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중인명선광인효현숙경영정순헌철고순
비록 저는 성인이 된 후에 한국사를 공부하면서 제대로 알게 되었지만(반성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에게 친숙한 조선 왕의 순서입니다. 사실 조선시대는 왕의 순서만 알아도 풀리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꾸러기 수비대(똘기 떵이 호치 새초미 자축인묘, 드라고 요롱이 마초 미미 진사오미, 뭉치 키키 강다리 찡찡이 신유술해~)' 노래처럼 정확하게 입에 붙도록 암기합시다.
15세기, 조선전기(왕권과 통지체제의 정비)
태조(1392~1398) | 정종(1398~1400) | 태종(1400~1418) |
세종(1418~1450) | 문종(1450~1452) | 단종(1452~1455) |
세조(1455~1468) | 예종(1468~1469) | 성종(1469~1494) |
16세기, 조선전기(사림의 대두와 사화)
연산군(1494~1506) | 중종(1506~1544) | 인종(1544~1545) | 명종(1545~1567) |
16세기말~17세기말, 조선후기(붕당, 임진왜란, 호란의 시기)
선조(1567~1608) | 광해군(1608~1623) | 인조(1623~1649) | 효종(1649~1659) | 현종(1659~1674) |
17세기말~18세기, 조선후기(탕평과 실학의 시기)
숙종(1674~1720) | 경종(1720~1724) | 영조(1724~1776) | 정조(1776~1800) |
19세기, 조선후기(세도정치)
순조(1800~1834) | 헌종(1834~1849) | 철종(1849~1863) |
19세기, 조선후기(흥선대원군 집권기 · 근대태동기)
고종(1863-1907) | 순종(1907~1910) |
고려 말의 상황과 조선의 건국 과정
지금부터 519년간의 조선 왕조 탄생 이전의 고려 말 시대 상황과 조선 건국 과정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려 말의 상황
공민왕의 개혁 정책이 실패하면서
- 권문세족의 도평의사사 장악, 불법과 비리에 의한 대농장 소유에 따른 경제적 문제 및 정치 기강 문란등의 문제로 민생이 파탄되었다.
- 홍건적과 왜구의 계속되는 침입으로 사회가 혼란하였으며 이 과정에 이성계 등의 신흥 무인 세력이 성장하게 된다.
- 신진사대부의 분열이 발생한다.
조선의 건국 과정
우왕 즉위(1374)
공민왕 사후 권문세족 이인임의 추대로 우왕이 고려의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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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임 축출(1388)
최영이 이성계와 신진사대부 세력에 힘입어 이인임 일파를 축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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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 철령위 설치 통고(1388)
명이 철령위 설치를 통보하자 요동정벌론(최영, 우왕)과 4 불가론(이성계)으로 국론이 분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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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정벌 단행(1388)
최영이 이성계에게 요동 정벌을 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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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 회군(1388)
요동 정벌에 반대했던 이성계(with 조민수)가 위화도에서 4불가론을 주장하며 회군을 청하였다.
이를 반대한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위시켰으며, 창왕을 옹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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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가입진(1389)
이성계 일파가 실권을 장악하기 위해 우왕이 신돈의 자식이라 그의 아들 창왕도 가짜이기 때문에 폐하고 진짜를 세워야 한다는 명목으로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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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전법 공포(1391)
급진개혁파 신진사대부 세력(정도전, 조준 등)이 급전도감을 통해 토지 개혁을 단행하여 과전법을 실시하였다. 저화를 발행하였으나 유통되지는 않았으며, 무과를 실시하고 삼군도총제부를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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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 개혁파의 온건 개혁파 제거, 도평의사사의 장악,
이성계 즉위(1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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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호를 '조선'으로 제정(1393)
천손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을 단군조선에서 도덕적 문화의 전통을 기자조선에서 계승한다는 의미로 국호를 조선으로 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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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천도(1394)
풍수지리설의 영향, 신도궁궐조성도감(1394) 설치하여 도시 계획을 구상한 후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1. 소국이 대국을 거역하는 것은 불가하다.
2. 여름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불가하다.
3. 거국적으로 원정을 하면 왜구가 그 틈을 노릴 것이다.
4. 지금은 덥고 비가 많아 병기 관리가 곤란하고 전염병에 시달릴 것이다.
급진 개혁파(혁명파 사대부) | 온건 개혁파(온건파 사대부) |
정도전, 조준, 윤소종, 하륜 등의 소수파 | 정몽주, 길재, 이색, 이승인 등의 다수파 |
급진적 개혁, 역성혁명 | 점진적 개혁, 불사이군 |
고려왕조 부정 | 고려왕조 유지 |
신흥무인세력과 농민군 | 군사력 없음 |
왕토사상을 주장하며 전면적 토지 개혁 주장 | 토지의 사유화는 인정하되 전면적 토지 개혁 반대(대규모 토지 소유 부정) |
15세기를 집권하는 훈구파(관학파)로 발전 | 16세기를 집권하는 사림파로 발전 |
· 주변의 산: 조산(백악산/경복궁(법궁)), 안산(목멱산, 남산), 좌청룡(낙타산), 우백호(인왕산)로 배치
· 산을 연결하는 도성을 쌓고 4대 문과 4 소문을 건설, 도성 중앙에 보신각을 두어 오덕을 표현.
· 사대문: 숭례문(남대문), 흥인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소지문(북문)
· 사소문: 광희문(남소문), 혜화문(동소문), 소의문(서소문), 창의문(북소문)
15세기 국왕들의 업적, 조선초기(전기, 왕권과 통치체제의 정비기)
과전법은 이성계 즉위 전, 공양왕 재위시기에 실시되었습니다. 과전법 실시-이성계 즉위-조선으로 국호 제정-한양 천도는 유명한 기출문제 중 하나입니다. 물론 요즘 문제는 연관된 사료로 유추하도록 하거나, 고난도 지문을 배치함으로써 어렵게 내는 추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은 흔들리지 않도록 제대로 알고 있어야 되겠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왕권 강화를 위한 통치 체제를 정비하는 기간입니다. 조선의 토대가 정비되는 과정을 조선 왕조 계보 위주로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대, 태조 이성계(1392~1398)
- 정도전과 권근 등의 개국 공신들이 정치를 주도(신권의 약화)
- 조선 건국(1392) → 국호 '조선' 제정(1393) → 한양 천도(1394) → 한양부를 한성부로 개칭(1395)
- 친명사대외교를 펼쳤으나 정도전의 요동정벌계획 등으로 금인과 고명이 교부되지 않아 조선 국왕의 칭호를 받지 못하고 '권지국사'라는 칭호를 받음
- 한양 정비: 도성 축조, 경복궁 건립(1395), 정묘(좌묘우사), 사직(동종서사), 관아, 학교(한양에 성균관, 지방에 향교 설립), 시장, 도로 등 설치
- 의흥삼군부 설치(1393): 조선 초기 군령(a millitary command)과 군정을 총괄하던 관서
- 대마도(쓰시마) 정벌(1396): 김시형
- 1차 왕자의 난(1398, 무인정사): 이방원이 방석, 방번, 정도전을 제거하고 이방과(정종) 옹립, 1차 왕자의 난 이후 공신세력 제거
- 여진, 일본과는 교린정책
- 중농억상: 사전(농장) 혁파, 병작반수제 법적으로 금지하여 자영농 증가 등 농민 생활을 안정화함
- 억불숭유정책: 사원의 남설 금지, 도첩제 실시(승려 출가를 제한하였음)
- 동방이학의 시조
- 공민왕 때 관직생활을 하며, 성균관에서 강의를 하였다.
- 이인임의 친원 정책에 반발했다가 나주로 유배를 가기도 하였다.
- 조준과 함께 전제개혁론을 주장하였고 과전법을 실시하며 조선 개국의 정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 한양천도 때 궁궐과 종묘의 위치 및 도성의 기지를 결정하고 궁·문의 모든 칭호를 정하였다.
- 조선왕조의 정치조직에 대한 초안을 작성하였다.
- 의정부, 삼군도총제부, 의금부 설치 등 관제개혁을 통한 왕권강화를 추구하였다.
<금난잡영>
<금난잡제>
<심문천답>
<학자지남도>: 권근의 <입학도설>에 영향을 주었다.
- 조선경국전(1394): 민본적 통치규범 마련, 왕조의 기틀 마련과 신권정치의 기반 이룩, 사찬 법전
- 불씨잡변(1394): 불교비판 및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확립
- 심기리편: 불교뿐만 아니라 도교까지 비판하고 유학(성리학) 찬양
- 고려국사(1395): 고려시대의 역사 정리, 왕조 개창의 정당화와 성리학적 통치규범을 확립
- 경제문감(1395): 조선왕조의 정치조직 및 행정안 제시, 문물제도와 통치규범 정리
- 경제육전(1397): 조준과 함께 위화도회군 이후의 조례를 수집·편찬
- 진도(진법서): 요동 정벌 계획
- 문덕곡, 신도기, 몽금척, 수보록: 조선 건국 찬양
- 감사요약: 지방행정에 관해 충고(전해지지 X)
2대, 정종 이방과(1398~1400)
- 개경 천도(1399): 정치적 혼란을 피하기 위함
- 2차 왕자의 난(1400): 이방원이 방간(with박포)을 제거하고 정종이 방원을 왕세자로 삼은 후 양위
- 2차 왕자의 난 이후 도평의사사 축소 → 의정부로 개칭
- 중추원(추밀+승선)→ 삼군부로 개편 / 승선은 태종 때 승정원으로 개편
- 군· 정 분리(의정부: 정무 담당, 삼군부: 군무 담당)
태조 이성계 + 첫째 부인 신의왕후 한 씨
- 방과: 정종 즉위
- 방간: 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제거되었다.
- 방원: 태종 즉위, 2차 왕자의 난 이후 정종(방과)이 방원을 왕세자로 삼은 후 양위하였다.
- 외 3명
태조 이성계 + 신덕왕후 강 씨
- 방번
- 방석: 세자 책봉이 되었으나, 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 때 이방원에게 제거되었다.
3대, 태종 이방원(1400~1418)
- 1·2차 왕자의 난으로 개국공신을 몰아내고 즉위하였다.
- 왕권 강화 및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
- 왕실 외척(처남 민무구, 민무질 형제 숙청)과 종친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 왕위 즉위는 개성에서 한 후 한양으로 환도
- 보충군(1415, 신량역천): 천인 신분인 사람을 양민으로 승격될 수 있도록 만들었으나 유명무실
- 도평의사사를 폐지하고 6조 직계제를 실시(6조 산하 속아문제 확립)
- 왕은 신중하게 여겨... 이때 이르러 단행하였다. 내가 일찍이 송도에 의정부 없애라고 ~
- 창덕궁 건립(이궁 or별궁, 양궐 체제 성립)
- 의금부 설치, 승선→승정원(비서)으로 독립된 기구로 설치하여 왕권강화의 핵심기구로 활용
- (낭사→) 사간원 독립하여 기능과 규모를 약화시켜 대신을 견제
- 사병을 혁파하여 의흥삼군부로 편입시킴으로써 왕이 군사 지휘권을 장악하여 친위 군사 증가 및 국방 강화
- 거북선과 비거도선 제조
- 양전 사업 실시(20년마다) 양안 작성 및 호구 파악(3년마다) 실시
- 16세 이상 모든 남자(노비 포함)들에 호패법을 실시
- 호적 작성을 위해 10호 또는 수호를 하나의 인보로 묶어 통제하도록 인보법 시행
- 사원 정리 및 사원의 토지를 몰수하여 242사 이외는 폐지
- 신문고(등문고, 연산군 폐지, 영조 부활) 설치 및 의금부 관할
- 노비변정도감: 억울한 노비를 조사하여 해방
- 서얼의 문과 응시를 제한하고 한품서용제를 적용하는 서얼 차대법 제정
- 과부의 혼인을 제한, 재가하여 낳은 자식은 과거 응시 자격 배제 등 재가금지법 시행
- 주자소(인쇄소) 설치, 계미자 등 동활자 주조
- 사섬서를 설치하여 저화 발행
- 5부 학당 학제를 마련 (→ 세종 때 4부 학당으로 개편)
- 8도를 확립하고 부, 목, 군, 현 등 지방제도를 정비
4대, 세종 이도(1418~1450)
- 태종과 원경왕후 민 씨의 셋째 아들 충녕대군으로 왕세자로 책봉된 후 왕으로 즉위(태종이 4년 간 상왕으로 생존함)
- 재상 중심
-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중시
- 청백리(황희, 맹사성) 등용
- '의정부에서 정책을 심의하고 합의를 하였으나 왕이 인사권과 군사권을 직접 처리하였다.'
- 정책 연구, 경연(국왕), 서연(세자) 담당, 훈민정음 창제
- 집현전 학사를 일반 관리보다 우대
- 사가독서제(유급휴가) 실시(→정조 때 폐지)
- 사헌부의 규찰을 받지 않음
- 4부 학당제의 확립
- <삼강행실도>, <효행록> 등 윤리 서적 편찬 및 유교 보급
- 국가 행사를 유교식으로 거행(오례), <주자가례> 장려
- 왕도 정치를 내세워 유교적 민본 사상 실현
- 장영실과 같은 천인 등용
- 재인과 화척을 양민으로 신분 상승
- 실록을 보관하던 사고 정비: 춘추관, 성주, 전주, 충주 4대 사고 완성
- 쓰시마 정벌(1419): 이종무
- 4군(최윤덕, 압록강 유역) 6진(김종서, 두만강 유역) 개척, 삼남지방의 주민들을 이주시켜 변방 개발
- 3포 개항(1426, 부산포, 제포, 염포)→ 계해약조(1443, 세사미두 200척, 세견선 50척)
- 공법 시행(1444): 연분 9 등법, 전분 6 등법
- 조선통보 발행
- 사창제(대구), 의창제 실시
- 불교 교단을 정리(억불)하여 전국 36개 절만 인정, but 궁중에 내불당 설치
- 원의 수시력+ 명의 대통력을 참고하여 칠정산 내편 제작
- 아라비아 회회력을 참조하여 칠정산 외편 제작
- <석보상절> 간행: 수양대군(세조) 저
- 부민고소금지법: 향리·백성의 수령 고소 금지
- 원악향리처벌법: 부정한 향리 처벌
- 노비에 대한 사적인 처벌 금지, 태형 및 노비의 사형 금지
- 금부삼복법: 사형죄는 의금부에서 3심제로 집행
- 세종 말에 '토목의 변(명나라 황제가 포로로 잡힘)'이 일어나자 국방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 인쇄술의 발달: 경자자, 병진자, 갑인자 주조
- 식자판 조립법 창안
- 칠정산 편찬
- 혼의(혼천의), 간의
- 자격루(물시계), 앙부일구(해시계), 측우기(강우량 측정) 제작
- 대곡작곡: 정대업, 보태평, 발상, 봉래의
<용비어천가>: 한글로 간행,
<월인천강지곡>, <농사직설>, <삼가행실도>, <태산요록>, <동국정운>,
<효행록>, <향약채취월령>, <향약집성방>, <의방유취>,
<총통등록>: 무기제작·사용 방법 등
<여민락>: 음악,
<정간보>: 악보
5대, 문종 이향(1450~1452)
- 세종의 장남
- 신권 강화, 왕권 약화
- 건강이 좋지 못하여 2년 만에 사망
- <고려사>: 기전체
- <고려사절요>: 편년체
- <동국병감>, <대학연의주석> 등 편찬
6대, 단종 이홍휘(1452~1455)
- 문종의 아들
- 12세에 왕이 되어, 왕권이 약했으며 재상중심 (좌의정 김종서, 영의정 황보인, 우의정 정분)의 정치가 이루어짐
- 계유정난(1453):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안평대군을 제거함
- 이징옥의 난(1453): 김종서 부하인 함길도 절제사 이징옥의 반란
- 단종 폐위 후 노산군으로 격하되었다. 이후 숙종 때 시호를 노산대군으로, 묘호를 단종으로 정하였다.
7대, 세조 이유(1455~1468)
- 세종의 둘째 아들로 수양대군으로 봉해짐
- 계유정난(1453)으로 집권하여 단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함
- 정난공신(좌익): 신숙주, 한명회(압구정), 정인지, 권람
- 6조 직계제 부활 상왕이 어려서 ··· 복구한다.
- <경국대전> 편찬 시작
- 육전상정소에서 호전·형전을 간행하였음
- 집현전 학사 세력들을 중심으로 단종 복위 운동(1456)이 일어남 → 집현전·경연(1456) 폐지
- 정군 1명 당 보인 2명을 배치하는 보법 제정
- 중앙군 5위 및 진관체제 실시
- 오가작통 강화
- 직전법을 시행(현직관리에게만 수조권 지급)하였으며 수신전과 휼양전을 폐지
- 팔방통보(유엽전) 주조
- 상평창 제도 부활: 물가조절
- 종친 등용
- 장례원 설치
- 원구단을 설치하여 궁궐에서 초제 거행
- 국민윤리교과서 <오륜록> 착수
- 함경도 이시애의 난(1467): 세조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회령부사 이시애가 길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유자광, 남이, 이준에 의해 진압, 이로 인해 전국의 유향소가 폐지됨(성종 때 부활)
- 원상 제도: 세조 말년에 세자(예종)의 원만한 정사운영을 위해 신숙주, 한명회 등 훈신들에게 승정원에서 정무를 처리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한 임시 관직으로, 예종이 즉위하고 그 권한은 더욱 커졌다.
- 정난공신: 수양대군의 반란에 공이 있는 사람
- 좌익공신: 세조의 즉위에 공이 있는 사람
-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또는 김문기)
- 김시습, 원호, 이맹전, 성담수, 조려, 남효온
- <국조보감> 편찬
- <삼국사절요>, <동국통감> 편찬 시작: 성종 때 완성
- <월인석보> 간행
- 인지의, 규형 발명 → 양전과 지도제작에 이용
- 적극적인 불교 진흥책: 간경도감 설치하여 <월인석보> 등 불교 경전을 한글로 번역함, 원각사, 원각사지 10층 석탑 건립
- 을해자, 을유자(활자) 개발
- 농서 <사시찬요>, <금양잡록> (강희맹) 간행 시작
8대, 예종 이황(1468~1469)
- 남이 숙청
- 직전수조법 제정 및 둔전(군인주둔지의 농경지)에 민경을 허락함
9대, 성종 이혈(1469~1494)
- 예종이 즉위 1년 만에 사망 → 13세에 성종 즉위
- 정희왕후의 수렴청정 후 성종의 친정 시작
- 경국대전 완성 및 반포: '만대의 성법'으로 조선 왕조의 통치 체제를 확립
- 수장: 대제학
- 집현전을 계승한 것으로 홍문관 관원 모두가 경연을 겸하였으며, 왕의 정치적 고문 역할
- 왕과 신하가 모여 정책을 토론하거나 심의하는 경연을 활성화
- 유교 정치 이념 강화
-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김종직 등 사림을 등용
- 유향소 부활(1488): 김종직의 노력으로 유향소 복립
- 관수관급제 실시: 국가가 수조권을 대행하여 국가의 토지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
- 도첩제를 폐지하여 더욱더 강력하게 억불책을 실시하였으며 승려의 출가를 금지함
- 간경도감 폐지
- 과부재가금지법 시행
- 사창제 폐지
- 성균관 안에 도서관인 존경각 건립, 경적 소장
- 남호독서당
- 윤필상을 도원수로 하여 압록강을 건너 야인의 본거지 점령
- 허종이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 정벌
- 국조오례의 정리: 국가례인 길, 가, 빈, 군, 흉례의 5례 정리
- 길례: 각종 제사
- 가례: 왕실의 혼례, 책봉, 존호, 왕세자 입학, 조하, 진연, 진찬, 양로연 등
- 빈례: 외빈 사신 접대 등
- 군례: 활쏘기, 강무, 나례 등
- 흉례: 장례, 부묘
- <경국대전>
- <동국여지승람>
- <국조오례의>
- <동문선>
- <악학궤범>
- <동국통감>
- <삼국사절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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